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할아버지 사진첩을 넘기며(4화) - 전쟁 속에서도 지켜야 할 동심

About me..

by 공연소개하는남자 2014. 11. 14. 15:20

본문

<할아버지의 사진첩을 넘기며...4화> - 절망 속에서 지켜야 할 동심



<촬영일자 1951년 4월 20일>


이번에는 대한민국의 슬픈 역사, 1950년대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조부께서 전쟁 발발 직후 개성에서 피난 민 500명을 구호해 주고, 서울 후생학원 215명의 고아를 수용 중 서울까지 처들어 온 공산당을 피해 피난을 가야 했지만, 고아들을 친자식처럼 여겨 버리고 피난을 갈 수 없어 결국 아이들을 모아 놓고 유언을 하셨습니다.


 "애들아 나는 너희들을 버려두고 차마 어디로든 갈 수가 없다. 공산군이 오면 우리 내외는 죽일 것이다. 난 여기서 죽을 결심을 했다. 내가 죽거든 뒷산에 묻고, 내 아들 딸은 원장 자식이라 하지 말고 같이 살아라. 공산군은 고아는 죽이지 않는다고 했다." 


이렇게 유언을 하셨는데, 그 중에는  구세군 사관(목사) 자녀 7명도 함께 보호를 하고 있었는데, 고아들 중 한 사람도 비밀을 발설하지 않고 모두 고아로 속여서 죽음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인민군으로 입대를 시키려는 것을 고아라는 이유로 읍소하여 입대를 면할 수 있게 해 주었다고 함). 그리고 당시 구세군 사령관 관사와 구세군 사관학교에 <고아원 분원>이라는 현판을 붙이고 고아들을 수십명씩 낮에 뛰어놀게 해서 빼앗기지 않게 했다고 합니다.


당시 브라스밴드가 경성방송국에 하나, 후생학원에 하나가 있었는데, 당시 영국에서 온 제일 좋은 트럼펫이 후생학원에 있는 것을 알고 인민군 장교가 와서 접수하겠다고 하며, 악기와 함께 밴드를 모두 납북을 하려고 했답니다. 이때, 조부께서 "내가 잘은 모르겠지만, 김일성 장군께서 고아원 악기를 뺏어 오라고 시켰는가?"라며 따지자 인민군이 따발총으로 할아버지를 쏘려고 하는데 할머니는 놀라서 기절하시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공산당 장교는 일단 넘어갔다가 며칠 후, 악대와 악기를 모두 빼앗아 북한으로 갔다고 합니다. 


* 당시 납북된 후생학원 브라스밴드 18명 명단 *


강태설, 한기석, 김용덕, 이순은, 양태환, 홍갑용, 손희주, 백장기, 김기모, 이종수, 

김기영, 차광욱, 정생규, 박종운, 김주영, 이양수, 이길남, 박성수 

(진주에서 보낸 정준삼 사관의 보고서로 명단 확인) 


- 악대원 중에서 고*호 군만 납북 도중 유일하게 탈출, 후에 육군군악대장 역임.



당시 고아들을 불쌍히 여겨 헌신적으로 살은 이유일지는 모르지만 몇 번이나 위기를 넘기고 살아나셨는데, 당시 인민군은 후퇴하면서 할아버지를 죽이려고 했고, 국군은 들어오면서 인민군과 친하게 지냈다고 죽이려 했는데 잠깐 떠난 피난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215명의 고아 중, 도망가지 않고 남아 있는 고아 170명만 제주로 피난을 가게 되었는데, 170명이나 되는 피난을 갈 방법이 없어 피난을 갈 수 없는 도중에 인민군이 쳐들어 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조부께서는 서투른 영어로 미군을 찾아가 고아원 원장임을 밝히고 200명 가까이 데리고 사는데 불쌍한 아이들을 데리고 피난을 갈 방법이 없다고 하소연을 하면서 '당신도 자식들이 있지 않는가?'라며 서투른 영어로 말을 하자, 장교가 감동을 받아 책임지고 피난을 약속, 부산까지 군용트럭에 싣고 가서 부산항에서 LST배를 타고 제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미군과 한국군 장교의 도움으로 대부분의 원생들을 데리고 피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미군 LST배를 타고 제주도로 피난을 가신 후, 조부께서는 구세군 제주 후생학원을 설립하게 됩니다. 







사진 중앙에 군복을 입고 앉아 계신 분이 제 조부(허원조 사관), 조모(김옥녀 사관)이십니다. 당시 제 부친(허진 사관)은 8살의 어린이였습니다(우측에서 4번째 검은색 새라복을 입은 어린이). - 아이들의 옷에 새겨진 SABH는 The Salvation Army Boy's Home; 구세군 후생학원의 약자입니다.





(사진에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일본주재 미공군단에서 풍금을 제주후생학원에 기증할 때 촬영한 것으로 보아 1952년 정도로 추정)


조부(허원조 사관)께서는 미군의 도움으로 제주도로 함께 피난을 가신 후 "제주후생학원"을 세우신 후, 전쟁고아들을 보살피셨습니다. 동아일보 기자이셨던 조부께서는 사진을 남기시는 일에 관심이 많으셨던 것 같습니다. 또한 음악에 관심이 많으셨던 터라 구세군 후생학원 브라스밴드를 만들어 원생들에게 금관악기를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당시 브라스밴드는 대한민국에 몇 개 되지 않았던 때라고 합니다. 이렇게 음악을 배운 아이들과 함께 피난하고 있던 제주 지역사회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1953년 제주 구세군후생학원(원장 허원조 부령)이 제주읍장에게 감사장 전달>


그렇게 제주도에서 고아들을 양육하며 음악을 가르치신 것으로 1953년 10월 17일 제주읍장에게 감사장을 전달하며 지역사회에서 고아들에 대한 편견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들을 하신 것 같습니다. 사진과 음악에 관심 많으셨던 조부께서는 이렇게 전쟁 이전과 전쟁 속에 부모님을 잃은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신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간이었던 한국전쟁 속에서도 흔들리면 안되는 동심을 위한 조부의 노력을 몇 장의 사진으로 보면서 손자인 제가 코끝 찡한 감동을 받습니다. 2014년의 대한민국도 힘들고 어려운 시간 속에 있지만 그럼에도 절망은 희망을 이기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우리 모두 다시 한 번 희망으로 일어서도록 노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