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소년들에게 나팔과 삽, 빗자루를 주다 >
<포항구세군 소년부 청소대원 일동, 1936년 4월>
조부께서는 사부동(1931년)을 떠나 낙평(1932년), 영덕(1934년)에서 목회를 하시다가 1935년에 포항으로 목회지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구세군은 현재에도 군대처럼 발령을 받아 목회지를 옮기는 방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 조선 총독부에서는 구세군을 영국 군대로 이해하고 위협적인 존재로 생각을 하여 예민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교단의 목회자들과는 달리 구세군 사관(목사)의 발령에 대해서만 조선총독부 관보에 기재를 하였습니다. 덕분에 일제치하에서의 구세군 사관의 발령 기록은 구세군의 기록보다 더 정확하다는 웃지 못 할 일도 있습니다.
구세군 포항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한 1935년 이후 1년 반 동안에 280명이 회개를 하였다는 놀라운 기록을 발견하였는데 이 한 장의 사진을 보고 기록의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조부께서 부임하던 1935년 이전에 구세군 포항교회는 전임 목회자의 문제로 인해 교회가 문을 닫은 상태였기 때문에 교인이 거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부께서는 소년들을 모아 손에 나팔과 삽, 빗자루를 나눠주고 새마을 운동처럼 동네 청소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던 주민들이 소년들의 청소가 시작됨을 알리는 나팔소리와 함께 동네가 깨끗해지는 모습을 보며 조금씩 동참을 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구세군 포항교회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주게 되었습니다. 조부의 목회 1년 반 만에 280명이나 되는 분들이 회개를 하고 돌아왔다는 기록이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즘 교회를 향한 사회의 시선이 냉소적임을 알고 있습니다. 조부와 부친의 뒤를 이어 목사인 저 역시 이 현상에 대해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교회의 이기적인 모습과 교회답지 못한 모습에 실망하는 것은 목사인 저의 잘못 역시 크기 때문입니다. 조부께서는 이미 78년 전에 세상 속에서 교회의 역할에 대한 중요성을 알고 교회를 키우는 일이 아닌 동네를 위한 교회의 일을 찾아 교회 밖으로 나가셨다니 놀랍습니다. 왜냐하면 일제치하에서 한국교회가 해야 할 일들을 찾아 모범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삶을 선택하셨던 조부의 모습을 사진으로 만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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